호리 히데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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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리 히데하루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이다. 1590년 아버지 호리 히데마사의 사망으로 가독을 상속받았으며, 분로쿠의 역에 참전하고 후시미 성 공사에 기여했다. 1598년 에치고 가스가야마 30만 석 영주로 봉해져 무라카미 요시아키 등을 요력으로 삼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호리 나오마사의 보좌를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나, 잇키 발생과 진언종 탄압 등의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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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 히데하루 | |
---|---|
기본 정보 | |
씨명 | 호리 씨 |
이름 | 호리 히데하루 |
시대 |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초기 |
출생 | 덴쇼 4년 (1576년) |
사망 | 게이초 11년 5월 26일 (1606년 7월 1일) |
이명 | 규타로 (통칭) |
계명 | 쇼센지덴 손추다이코지 |
묘소 | 니가타현조에쓰시 나카몬젠의 린센지 |
관위 | 종5위 하, 좌위문독, 시종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요토미 히데요시 → 히데요리 → 도쿠가와 이에야스 → 히데타다 |
번 | 에치고후쿠시마번주 |
씨족 | 호리 씨 |
부모 | 아버지: 호리 히데마사, 어머니: 기타지마 요시시게의 딸 |
형제자매 | 히데하루, 지카요시, 무라카미 요시타다, 곤도 마사나리 |
배우자 | 정실: 하세가와 히데카즈의 딸 |
자녀 | 다다토시, 쓰루치요, 스에사토 |
2. 생애
1590년(덴쇼 18년) 아버지 호리 히데마사와 함께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했지만, 아버지가 진중에서 병사했기 때문에 가독을 상속받았다. 그해 11월 6일,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2]
1592년(분로쿠 원년) 분로쿠의 역에서는 히젠나고야 성에 참전했다. 이듬해(1593년)에는 후시미 성 공사에 공헌했다.
1598년(게이초 3년) 4월, 에치젠 기타노쇼 18만 석에서 에치고 가스가야마 30만 석으로 영지가 늘어나고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3]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호리 나오마사에게 24세의 젊은 히데하루를 보좌하도록 했다. 이때 무라카미 요시아키(9만 석), 미조구치 히데카쓰(6만 1천 석), 호리 치카요시(3만 석), 호리 나오요리(1만 석)를 가신으로 삼았다.
에치고로 이봉되었을 때, 이전 영주였던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가로 나오에 가네쓰구가 1년 치 세금의 절반을 이미 거두어 간 상태였다. 히데하루는 이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우에스기 측은 거부했다. 한편, 우에스기 겐신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은 즉신불이 되어 가스가야마성 기타노마루의 불식원에 안치되어 있었다.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유언에 따라 가스가야마성에 안치한 채 아이즈로 옮기려 했지만, 호리 가문의 재촉으로 유골 항아리를 아이즈로 옮기게 되었다.(당시 관례로는 영지를 옮긴 후에도 선조의 무덤이나 보리사는 이전 영지에 두는 것이 허용되었다.[4])
히데하루는 에치고에 들어오자마자 가스가야마성의 망루와 해자를 보수했다. 1600년(게이초 5년)에는 후쿠시마 지역으로 거처를 옮길 계획을 세웠다. 게이초 연간에는 2단계에 걸쳐 다이코 겐치 방식을 실시, 이전의 우에스기 겐치 방식을 부정하고 에치고 상부와 중부에 총 겐치를 실시하여 막번 체제의 기초를 확립했다. 이는 이후 에치고 여러 번의 겐치 제도에 큰 영향을 주었다.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하여 일족인 호리 나오시게를 인질로 에도에 보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자 동군에 가담, 그 이전인 4월에 나오에 가네쓰구의 밀명으로 에치고 국내에서 발생한 우에스기 구신·신관·승려의 봉기(에치고 잇키, 우에스기 유민 잇키)를 진압했다[5]). 전투 후, 이 공적으로 이에야스로부터 영지를 안도받았다.
잇키의 직접적인 원인은 우에스기 씨에 의한 것이지만, 히데하루는 나오에 가네쓰구에게 연공을 징수당해 재정이 곤궁했기 때문에 재정 강화를 위해 호리 겐지를 실시, 옻나무 등에 연공을 부과했다. 이 때문에 영민들의 불만이 높아졌으며, 사찰 통제도 강화하여 '진언 몰락'이라 불리는 진언종 탄압을 행한 결과라는 설도 있다.
2. 1. 에치젠 시대
1590년(덴쇼 18년) 아버지 호리 히데마사와 함께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했지만, 아버지가 진중에서 병사했기 때문에 가독을 상속받게 되었다. 그해 11월 6일,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2]분로쿠 원년(1592년) 분로쿠의 역에서는 히젠나고야 성에 참전했다. 분로쿠 2년(1593년)에는 후시미 성 공사에 공헌했다.
2. 2. 에치고 국주
게이초 3년(1598년) 4월, 에치젠 기타노쇼 18만 석에서 에치고 가스가야마 30만 석으로 영지가 늘어나고,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3] 이때 무라카미 요시아키(9만 석), 미조구치 히데카쓰(6만 1천 석), 호리 치카요시(3만 석), 호리 나오요리(1만 석)를 가신으로 삼았다. 히데하루는 24세의 젊은 나이였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호리 나오마사에게 그를 보좌하도록 했다.에치고로 이봉되었을 때, 이전 영주였던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가로 나오에 가네쓰구가 1년 치 세금의 절반을 이미 거두어 간 상태였다. 히데하루는 이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우에스기 측은 거부했다. 한편, 우에스기 가문의 전 당주였던 우에스기 겐신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은 즉신불이 되어 가스가야마성 기타노마루의 불식원에 안치되어 있었다.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유언에 따라 가스가야마성에 안치한 채 아이즈로 옮기려 했지만, 호리 가문의 재촉으로 유골 항아리를 아이즈로 옮기게 되었다.(당시 관례로는 영지를 옮긴 후에도 선조의 무덤이나 보리사는 이전 영지에 두는 것이 허용되었다.[4])
히데하루는 에치고에 들어오자마자 가스가야마성의 망루와 해자를 보수했다. 게이초 5년(1600년)에는 후쿠시마 지역으로 거처를 옮길 계획을 세웠다. 게이초 연간에는 2단계에 걸쳐 다이코 겐치 방식을 실시, 이전의 우에스기 겐치 방식을 부정하고 에치고 상부와 중부에 총 겐치를 실시하여 막번 체제의 기초를 확립했다. 이는 이후 에치고 여러 번의 겐치 제도에 큰 영향을 주었다.
2. 3. 세키가하라 전투
1598년(게이초 3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하여 일족인 호리 나오시게를 인질로 에도에 보냈다. 1600년(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자 동군에 가담, 그 이전인 4월에 나오에 가네쓰구의 밀명으로 에치고 국내에서 발생한 우에스기 구신·신관·승려의 봉기(에치고 잇키, 우에스기 유민 잇키)를 진압했다[5]). 전투 후, 이 공적으로 이에야스로부터 영지를 안도받았다.잇키의 직접적인 원인은 우에스기 씨에 의한 것이지만, 히데하루는 나오에 가네쓰구에게 연공을 징수당해 재정이 곤궁했기 때문에 재정 강화를 위해 호리 겐지를 실시, 옻나무 등에 연공을 부과했다. 이 때문에 영민들의 불만이 높아졌으며, 사찰 통제도 강화하여 '진언 몰락'이라 불리는 진언종 탄압을 행한 결과라는 설도 있다.
참조
[1]
논문
堀秀治論
[2]
서적
日本近世武家政権論
日本図書刊行会
[3]
서적
不識院御堂と謙信の神格化
高志書院
[4]
서적
不識院御堂と謙信の神格化
高志書院
[5]
서적
川口市史
川口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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